동네 도서관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책이다.
동일한 작가가 맞는지 너무도 달라 놀라웠다.
그 당시 밑줄을 그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감동이 있다.
로맹 가리의 '자기앞의 생'은 간결하고 읽기 쉽다.
마지막에 다가온 묵직한 감동은 엄숙하게 다가온다.
10살 고아소년 모모의 성장소설이라 말하기에 아까운 깊은 울림이 있는 책이다.
어린 모모가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모는 묻는다.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수 있느냐고...
'숨은 쉬지않지만 상관없다고, 사랑했으니까'라고 말한다.
사랑을 믿고 싶은 모모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사랑뿐 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쁘지 않았다.
병들고 돈도 벌지 못하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를 돌보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름답다.
하밀 할아버지는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검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원래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으며 구분할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단 하나 사랑뿐 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소설가 조경란 작가의 말로 마무리 한다.
'자기 앞의 생'은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비범한 일이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모모는 내게 말해주었다.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더불어 드라마틱한 로맹가리 작가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그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단편도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p12)
로자 아줌마는 사람은 꿈을 많이 꿔야 빨리 자란다고 했는데,
보로라는 사람의 주먹이 그렇게 큰 걸 보면, 그의 주먹은 쉴새 없이 꿈을 꾸었나보다.
(p55)
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 나는 너무 열이 올랐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 녀석이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지?
(p62)
마침내 어느 날 로자 아줌마는 자신이 자는 동안 내가 암사자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줌마는 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다만 내가 자연의 법칙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져 집 안에 야생동물이 있다는 생각에 밤마다 공포에 떨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나에게는 꿈인 것이 아줌마에게는 악몽이 되었던 것이다.
로자 아줌마는 꿈이 오래되면 악몽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두 마리의 암사자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p74)
하밀 할아버지는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 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p93)
나는 마약주사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은 만큼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는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나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기 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나는 행복해 지자고 주사를 맞는 짓 따위는 안 할 거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겪어본 후에야 그 놈의 행복이란 걸 겪어볼 생각이다.
(p99)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
(행복에 대한 하밀 할아버지의 말)
(p100)
사람이 아프면, 눈이 커지면서 표정이 풍부해진다.
로자 아줌마의 눈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이유도 모른 채 매를 맞으면서 자기를 때리는 사람을 바라보는 개의 눈 같아졌다.
(p115)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p116)
내게도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내게 고통만 주는 무능한 노인네보다는 더 나은 가정을 택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로자 아줌마가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를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p126)
열 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p148)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p174)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p265)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는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p296)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사랑했으니까.
(p301)